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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詩 飜譯의 大家 雨田 辛鎬烈 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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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 |
김명호 |
글정보 |
Hit : 3028, Date : 2011/06/14 1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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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田 辛鎬烈 선생은 우리나라의 수많은 漢文古典들을 정확하고 유려하게 國譯한 업적만으로도 길이 기억되어야 할 분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학자들이 學界의 연구를 주도하다시피한 점에서는 197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韓國漢文學에 대한 硏究가 飛躍的으로 발전하게 된 礎石을 놓은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雨田 선생은 日帝强占期인 1914년 음력 4월 27일 全南 咸平郡 羅山面 松岩里에서 출생했다. 本貫은 靈山으로, 咸平에서 世居한 선비 집안 출신이다. 부친이 마흔 살에 둔 외아들이어서 애지중지 자랐다고 한다. 3세 때 조부 무릎 위에서 ≪千字文≫을 배웠고, 6세 때부터 羅州의 漢學者 謙山 李炳壽 선생을 家塾에 모시고 ≪通鑑節要≫, ≪小學≫, ≪論語≫ 등을 배웠다. 8세 때 鄕校에서 개최한 七書講場에 ≪大學≫으로 應講하여 壯元을 차지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 뒤 孤山 尹善道 선생의 後裔인 海南 尹氏와 결혼한 17세 무렵까지 四書를 비롯하여 ≪史記≫, ≪唐宋八家文≫과 六經, 諸子百家書 등을 두루 읽었다. 18세 때 謙山 선생이 羅州로 돌아가 學塾을 열자 그곳에서 계속 수학하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新式 定規學校에는 일절 다니지 않았다. 조부와 부친이 義兵의 軍資金을 댔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한 이후로 ‘왜놈의 학교에는 절대로 가선 안 된다.’는 것이 집안의 鐵則이었다고 한다. 20세 무렵부터는 이따금 上京하여 서적을 열람하거나 鄕里에서 獨學하며 지냈다. 23세 때 慶南 咸陽으로 眞菴 李炳憲 선생을 찾아가 반년간 머물며 論學하였다. 眞菴 선생은 淸末 今文經學의 巨頭인 康有爲 문하에서 수학한 고명한 儒學者였다. 日帝末의 暗黑期에는 상경한 길에 爲堂 鄭寅普 선생을 隱居 중인 자택으로 찾아뵌 적도 있고, 解放 직후 混亂期에는 상경하여 譯經院에서 山康 卞榮晩 선생을 從遊하기도 했다.
6ㆍ25 동란 후인 40대 초부터 선생은 줄곧 서울에서 홀로 지내며 漢學에 專力하였다. 점차 명성이 높아지면서, 亞洲詩壇의 韓國指導委員, 東方古書國譯刊行會 編輯部長 등에 就任했다. 1960년 彭國棟 著 ≪韓中詩史≫를 國譯ㆍ刊行했는데, 이는 선생이 國譯한 최초의 譯書이다. 이후 ≪眉巖日記≫, ≪大東野乘≫, ≪松江集≫, ≪三國史記≫, ≪阮堂集≫, ≪河西集≫, ≪退溪詩≫, ≪白湖全集≫, ≪燕巖集≫ 등 수십 종의 國譯書들을 잇달아 간행하였다. 그 공로로 1985년 民族文化推進會(한국고전번역원의 前身)가 제정한 제1회 古典國譯賞을 受賞하였다.
한편 선생은 1961년 동국대 대학원에 出講한 이후 서울대ㆍ고려대ㆍ성균관대 대학원 등에서 강의하며 後學들을 지도하였다. 또한 1970년대부터 民族文化推進會 附設 國譯硏修院 교수를 역임하면서 수많은 國譯專門家를 양성하였다. 주로 ≪詩經≫, ≪書經≫, ≪史記列傳≫, ≪莊子≫, ≪禮記≫, 杜詩, ≪詩話叢林≫ 등을 가르쳤으며, 民族文化推進會에서 企劃한 國譯書들을 번역하고 校閱하였다. 그리고 자택에서도 講會를 열어, 매주 월ㆍ수ㆍ금요일에 經史子集을 강의하고 토요일마다 ≪燕巖集≫을 講讀하였다. 당시 선생의 한옥이 北岳 아래 司諫洞에 있었으므로, 이를 ‘白岳精舍’ 講會라고 했다. 1986년에 결성된 白岳會는 門下生들의 모임으로, 당시 회원이 400여 명에 달했다.
雨田 선생은 1993년 5월 15일 享年 80세로 別世하였다. ‘雨田’이라는 선생의 號는 스승 謙山 선생이 지어주신 것이라 한다. 이는 ≪詩經≫ <大田>에서 따온 것으로, 先公後私의 정신을 담은 號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생의 號에서 무논에 孤高하게 서 있는 鶴의 風貌를 연상하곤 하였다. 선생이 하얀 모시 한복을 즐겨 입고 수려하신 용모에 학 울음처럼 청아한 음성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雨田 선생은 古典國譯의 大家로 定評이 났거니와, 특히 漢詩 飜譯은 독보의 경지로 평가되었다. 이는 선생이 당대 最高의 漢詩 작가로서 창작에도 남다른 공력을 기울인 때문일 것이다. 대표작으로 5言 116句의 長篇古詩 <餞梅花>가 있다. 하지만 선생은 평소 글에 대해 워낙 엄격하여 完璧한 작품이 아니면 남기기를 꺼려하셨다. 선생의 문집으로는 詩文 殘篇을 모은 ≪雨田先生逸稿≫가 있을 뿐이다.
선생은 실로 多才多能하신 분이었다. 書藝에도 一家를 이루어, 서울 南山公園의 <安重根義士記念碑文>, 三淸洞 總理公館의 柱聯, 羅州의 <眉泉書院廟庭碑文> 등 名筆을 多數 남기셨다. 선생은 國樂에도 造詣가 깊었으며, 名唱 金素姬 女史와 平生 親交가 있었다. 또한 國手 盧史楚 선생에게 순장바둑(우리나라 전통 바둑)을 배우고 韓國碁院의 草創期에 활약한 ‘당대의 마지막 老國手’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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